※ 영화 <추락의 해부>에 대한 스포일러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남편 마뉘엘을 살해한 혐의로 기소된 산드라. 그러면 사용한 흉기는 어디 있느냐는 변호사 측 대응에, 검사는 코웃음 치며 말한다. “어딘가 숨겨놨겠죠.” 증거재판주의를 가볍게 무시하는 (그래서 누군가는 이 영화를 한심하다고 생각하게 만들법한) 이 발언은 <추락의 해부>의 접근 방식을 함축한다. 법정과 관객에게 주어지는 명백한 사실은 오로지 마뉘엘의 사망뿐이다. 왜 현관 지붕에서 마뉘엘의 DNA가 검출되지 않았는지, 의문사 전날의 말다툼은 그의 자살과 타살 둘 중 어디에 더 무게를 싣는지 관객은 이 단편적 사례들을 맥락으로 엮어 믿을 뿐이다. 152분의 상영시간 동안 사고, 자살, 타살 그 각각의 가능성을 제시하지만 무엇 하나 결정적이진 않으며, 남은 것은 이해 당사자여서 중립적인 접근이 불가능한 산드라와 아들 다니엘의 증언 뿐이다. 끝끝내 의문사의 진실은 산드라의 머릿속에 꽁꽁 감춰진 채 풀리지 않는다. 결국 <추락의 해부>는 (누구도 부정할 수 없는) 실재는 자취를 감췄고 오로지 맥락만 존재하는 상황에서 우리는 진실에 접근할 수 있는지에 대해 질문하는 작품이다.

감독 쥐스틴 트리에는 이러한 의심을 영상 그 자체에 대해서도 던진다. 딥페이크로 녹취와 영상이 담보하던 진실성이 흔들리는 시대에 말이다. 일반적으로 우리는 영화 안에서 다뤄지는 영상, 특히 플래시백이 과거의 진상을 담보한다고 여긴다. 하지만 <추락의 해부>는 마네킹을 이용한 재연 과정 중에 마뉘엘의 사망 원인을 자살과 타살 모두 플래시백함으로써 그러한 가정을 스스로 내던진다. 그런 식의 관객과의 진실공방은 애초에 할 생각이 없었다는 듯 말이다. 전날의 말다툼도 (배우들의 불꽃 튀는 연기를 차마 지울 수 없어서인지) 어느 정도 영상으로 보여주다, 그 말미의 물리적 충돌은 녹취로만 제시한다. 그 충돌의 세부 사항은 산드라의 증언에만 의존할 뿐이다. 다니엘이 아빠 마뉘엘과의 일화(스눕과 다니엘을 태운 차 안에서 주변 존재의 ‘유한성’에 대해 이야기한)를 증언할 때, 마뉘엘의 화면에 다니엘의 증언이 덧입혀진다. 정말 그 발언이, 일화가 마뉘엘의 것인지 관객은 확신할 수 없다.
그럼에도 감독은 영상의 힘을 영리하게 이용하기도 한다. 관객은 어찌 됐든 작품의 주인공인 산드라를 응원하게 되고, 법정(특히 얄미운 스킨헤드 검사와 아들에게 의심받고 분리되는 시련!)의 무자비함 속에 그녀에게 더욱 이입하게 된다. 그러던 순간, 철저히 대상으로 취급받던 마뉘엘이 영상으로 살아 움직이자, 유러피안 스타일의 매콤한 폭로(양성애, 외도, 가사 문제)와 더불어 관객들은 동요하기 시작한다.

지난한 재판을 거쳐 부부의 전사를 처절히 해부하고도 법정은 죽음의 ‘어떻게’는커녕, ‘왜’조차도 간신히 추측할 뿐이다. 결국 관객은 극 내부의 법정과 영화 자체 모두에서 진실에 접근할 수 없다(혹은 그 접근이 허락되지 않는다)는 결론에 다다른다. 그렇다면 이쯤에서 의문사에 대한 판단을 멈추는 것이 지성인의 태도이겠지만, 도저히 그럴 수 없다. 마뉘엘의 죽음을 초래한 물리적 원인은 그것이 우연이든 무엇이든 존재할 테니까. 관객은 단순히 그 개연성을 참지 못해 죽음의 원인을 확정하고자 하지만, 아들 다니엘은 앞으로 살아가기 위해 자신이 고집부렸듯 이와 직면할 수밖에 없다. 선택할 수 있는 진실?은 소름 끼치게도 단순하다. 자살한 아빠냐, 살인자 엄마냐. 이 영화의 비극은 아이러니하게도 언제든 굳건할 진실, 죽은 자는 말이 없고 산 자는 살아가야 한다는 데에서 온다. 그렇다면 살아남은 우리와 다니엘에게 남은 선택권은 작가인 산드라가 자신의 인생을 책 속 이야기에 집어넣은 것과는 반대로, 이야기를 인생에 투영하는 것뿐일지 모른다. 애초에 진실 따위는 없었다는 듯. 하지만 언젠가 분명히 마뉘엘 시신의 서늘한 실재는 무심히 진실의 다른 가능성을 고이 든 채 우리의 안온한 일상을 두드릴 것이다. 언젠가 분명히.

+ 산드라가 작가이고 그녀의 작품이 본인의 인생을 반영한 점은 의미의 확장을 위해 의도적으로 그 끝 단자를 마감하지 않은 느낌이 드는 설정이다. 이에 겹쳐 볼 때, 감독 쥐스틴 트리에와 각본을 함께 쓴 남편 아르튀르 아라리가 작품 속 말다툼에 대해 실제로 다투었다는 일화는 대단히 인상적이다. 그럼에도 그 설정이 탈진실 혹은 메타적인 독법에 가닿는지에 대해 가지치기가 필요하지 않았나 싶은 느낌이 든다. 가득이나 함의가 넘쳐나는 작품이기 때문이다. 또 이러한 지점들을 상당히 노골적으로 드러내고 있다는 점(TV쇼와 검사의 입을 통해 읊어준다)에서 친절하다기보다 쑤셔 넣는다는 인상이 상당하다. 아무튼 진실에의 접근 가능성과 접근이 불가능하다면 어떻게 살아가야 할지에 대해 같은 해 칸 영화제에서 수상한 고레에다 히로카즈의 <괴물>과 비교해 볼 지점이 상당하다.
+ 물리적 증거 없이 정황에만 의존할 수밖에 없는 범죄엔 대표적으로 성폭력이 있다. 범죄 여부를 피해자의 증언에 전적으로 의존할 수 밖에 없는 불가피한 측면 때문에 무고죄를 비롯한 뜨거운 논의가 있곤 했었다. 그러한 상황을 부부간 살인으로 재현하기 위해 제법 과한 설정이 들어가긴 했지만, <추락의 해부>의 선택은 일방적인 성폭력보다 훨씬 흥미로운 지점으로 가지를 뻗는다. 우선 아들 다니엘의 관점이 포함될 수 있었고, 한 명이 죽어버렸으므로 진술의 교차검증도 불가능하다(기껏해야 여러 차례의 진술이 번복되느냐 여부인데, 당장 남편/아빠가 죽었는데 기억이 온전하겠는가). 또 산드라와 마뉘엘의 뒤집힌 전통적 성역할을 보는 것도 이러한 선택이 없었다면 볼 수 없었을 것이다.
- 산드라 측의 변호사 역을 맡은 스완 아를로드는 중성적이고 동서양이 뒤섞인 듯한 모호한 페이스를 보인다. 법조인이라면 마땅히 그래야 하겠지만, 그 본심이 흐릿하게 숨겨진 탓에 작품의 주제의식을 구현한 인물처럼 느껴졌다. 이마를 드러내는 은발의 장발도 기억에 남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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