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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호가의 흔적/본 것

사바하 - 정경(情景)의 오컬트, 전복의 미스터리, 연민의 호러

※이 글은 영화 전체의 스포일러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1999년, 영월에서 쌍둥이 자매가 태어났다. 언니인 '그것'은 털로 뒤덮인 악귀로 태어나 말조차 배우지 못한 채, 족쇄에 묶여 짐승처럼 살아간다. 동생인 금화는 언니 때문에 다리를 절며 광신도인 조부모와 시골을 전전한다. 크리스마스 무렵, 신흥종교 비리를 파헤치는 박웅제 목사는 불교에 기원을 두고 있지만 이례적으로 사천지왕을 섬기는 종교단체 '사슴동산'에 의심을 품게 된다. 한편 영월 터널 콘크리트 벽에서 여중생 시체가 발견되고, 이 살인사건의 범인인 김철진은 자살하지만 그와 모의를 갖던 정나한은 금화를 죽이려 한다. 사슴동산의 경전을 손에 넣어 조사하던 박 목사는 잠언으로 이루어진 후반부에 주목하고, 이 내용을 김제석이라는 종교지도자가 작성했음을 알게 된다. 김제석은 자신이 후원하던 소년원에서 부친을 살해한 소년 넷을 양자로 들였고, 김철진과 정나한이 포함된 이 넷이 영월에서 태어난 99년생 소녀들을 살해했다는 것도 밝혀진다. 정나한은 금화를 살해하기 위해 그녀의 방문 앞까지 다다르지만, 짐승을 부리는 '그것'의 방해로 실패한다. 김제석이 본격적으로 경전 작성에 몰두하는 계기가 된 나충텐파 스님에게 조언을 구한 박목사는 김제석의 양자들(사천지왕)이 여자아이들을 살해한 계기가 그 아이들 중에서 김제석을 죽일 뱀이 있다는 예언 때문임을 알게 된다. 정나한은 다시금 금화를 납치하다 '그것'의 존재를 알게 되며, '그것'을 대면한 후 김제석을 의심하게 된다.



<염불이 연호하며 드러나는 탱화의 존재감은 압도적이다.>



 무엇보다 우리가 신에게 기대하는 것은 구원이라기보다 의미이다. 삶의 의미. 혹은 의미가 곧 구원이다. 근시야 마저 가려버리는 인생의 풍파 속에서 운명의 기로를 드러내는 삶의 의미는 모든 것을 주고서라도 얻고 싶은 것이다. 그렇게 김제석은 아비를 살해한 아들들에게 다가갔다. 그렇게 박웅제는 신에게 의심을 품었다. 그렇게 금화는 신에게 반항했으며, '그것'은 그렇게 죽었다.


 예수라는 메시아가 태어나기에 앞서, 동방박사의 의도치 않은 입방정으로 헤롯 왕에게 살해된 베들레헴의 아기들을 모티프 삼은 본작은 연민에 가득 차 있다. '눈물 흘리는 신'가 그렇듯, 그리고 어떻게든 추출한 한민족의 정서 '한恨'이 그렇듯, 신과 신에 필적하려는 자에 의해 바스러진 여린 존재들에게 이 영화는 끊임없이 고개를 숙인다. 이 묵례는 추모와 동시에 그들의 이야기를 담기 위함이다. 호러 장르를 기대한 이들에겐 아쉬울 수 있는 이야기다. 맘 편히 미워하고 무서워할 수 있는 존재가 사라지니까. '알고 보면 그놈도 좋은 녀석이었어.'라는 독자 훈계 스토리텔링에 치를 떠는 많은 이들에게도 실망스러울 수 있는 이야기다. 


 하지만 불교의 순환적 세계관을 기초로 하는 본작은 모든 것은 연결되어 있으며, 선과 악은 절대적인 것이 아닌 상황에 좌우됨을 시사한다. 이는 어쩌면 손쉽고 무책임한 방법으로 플롯의 인과관계를 논파하는 식일지도 모르지만, 우리가 평소엔 생각해보지 못한 관점을 선사하는 것에 주안점을 더 두고 싶다. 어쩌면 이 이야기는 약에 쓰려면 없는 개똥처럼 하찮고 혐오스러운 존재가 제 임무를 마치는 이야기인 것이다. 



<문을 열기 전엔 무엇이라도 될 수 있다. 가장 큰 두려움은 그곳에서 온다.> 



 만일 신의 뜻이 있다면, '그것'이 악귀로 태어난 것은 출생신고를 피해 김제석의 감시에서 벗어나기 위함이었을 것이다. 자해하며 고행을 하는 할머니는 얼핏 광신도로 보일 수 있는 인물이나, 되려 이러한 종교적 태도가 '그것'을 피 흘릴 때, 즉 생리 때까지 살아남게 했다. 쌍둥이의 부모는 출산 중 사산하거나 자살했지만 말이다. 즉 현생에서 자신에게 주어진 손녀를 업보로 담담히 받아들이는 조모의 종교적 태도가 금화에겐 장애물이 되었지만, 미륵의 경지에 오른 김제석을 처치할 수 있었던 유일무이한 방법이었다.


 말조차 배우지 못했으나, 정나한이 고이 잡고 있던 유년기 추억을 비집어 그를 구원하는 '의심'을 자아낸 '그것'. 탈피를 통해 눈물 흘리는 신의 현신身이 된 '그것'. 비슈누가 10개의 아바타라로 나타나듯 말이다. 하지만 악신을 잡는 악귀를 위해 15년을 축생보다 못한 대접을 받으며 살아간 '그것'에게 눈길이 간다. 어쩌면 신의 개입은 그 자체로 누군가의 희생을 부를 수밖에 없는가? 다시 앞으로 되돌아가자. '메시아의 탄생을 위해 얼마나 많은 희생을 감내할 수 있는가?'라는 감독에게 던져진 질문에서 출발한 이야기는 '메시아가 자신을 위해 희생을 강요한다면 그를 메시아라 부를 수 있는가?'라는 질문으로 정나한에게 주어진다. 


 위 두 질문에서 마주치게 되는 모순. 과연 강요된 희생은 희생인가. 희생은 자신의 것을 바치는 것, 즉 자기 의지가 반영되어야 한다. 그렇지 않은 '강요된 희생'이란 비문은  살육과 도륙으로 추락한다. 이는 신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이 와중에 살인이 자신 인생의 의미로 새겨진 인물, 정나한. 우리가 그의 시선을 공유하며 같이 트라우마에 빠질 때, 먼저 보게 되는 것은 나무틀에서 기어 내려오는 한 맺힌 (김제석에 따르면) 마군들의 핏기 어린 눈이다. 그리고 목매달린 시체들의 다리를 보게 되는데, 이는 어쩌면 목을 매달고 죽은 다른 사천지왕, 김철진의 최후를 보며 토사구팽당할 자신의 미래를 현시했다고 볼 수도 있다. 하지만 정나한은 '그것'과의 만남 이후 의심을 품고 자신의 믿음을 시험한다. 애초에 대리인을 통해 만들어진 믿음임을 깨닫고, 정나한은 도구로서의 생을 스스로 마감해 진정한 마귀 잡는 마신으로 죽는다. 눈은 마음의 창이지만 때로는 거울이 되기도 한다(정나한이 무심코 '그것'이 있는 창고로 향할 때 개의 눈에 비친 그의 모습이 그러하듯). 그가 코끼리의 눈에서 마주한 추위는 고스란히 그의 유언이 되어 돌아온다. 하지만 그가 끝내 마주한 추위는 한이 서린 추위가 아닌 개인으로 마주한 사바세계의 추위였을 것이다.



<악몽을 꾼다는 건 죄책감이 있다는 말. 죄책감이야말로 9천만 원 이상을 절약할 수 있는 수단이다.>



 하나 빼먹은 인물. 박 목사는 영화의 중심을 쥐고 있지만, 사실 중심 플롯에서 정보를 제공하는 지점을 빼면, 개입하는 부분은 극히 적다. 그의 이야기는 고스란히 과거에 머물러있다. '내 친구가 겪은 일인데'로 시작하는 자기 이야기 말이다. 또 분명 본작이 초현실적인 영역을 다루고 있음에도, 박 목사에게는 숭고의 경험(육손이라던가, '그것'의 존재라던가)은 좀처럼 주어지지 않는다(이렇게 관객과 박 목사, 정나한에게 주어지는 정보 차이가 제법 커, 플롯을 따라가는 데 상당히 애를 먹기도 한다.). 박 목사에게 이 사건은 논리적이고 이성적인 영역에서 이해할 수 있는 것이다. 한 사이비 교주가 예언에 눈이 멀어 애꿎은 여자아이들을 양자들을 시켜 살해하다 양자 하나가 배신해 자신의 심복을 불태워 죽인 이야기. 과연 그가 숭고의 경험을 겪었다면, 그는 다시 믿음을 갈구할 수 있을까. 메시아의 탄생을 축하하는 폭죽을 배경으로 매듭짓는 소망 고백을 넘어선 신실한 믿음 말이다.


 성경에서 모티프를 얻어 불교적 세계관에 투영한 지점은 불교의 역사를 지나 크리스트교가 성행하는 한국의 독특한 종교지형에서야 탄생할 수 있는 명실공히 이 영화의 최대 성취이다. 불교의 순환적 세계관과 기독교를 포함한 서양의 이원론적 세계관이 맞붙으면서 서사에서 전복을 꾀하고도 말이다. 또 대한민국에서 제작된 영화 중 동물의 이미지를 가장 시각적으로 흥미롭게 사용한 영화이기도 하다. 도시의 삶에서 익숙한 이들에게 동물이 주는 생경하고 솟구치는 감각은 사슴동산 출입구와 도입부의 미장센을 최상으로 끌어올렸다. 굿하는 장면(염소들이 꼬챙이에 꿰인 듯 대여섯 마리가 쌓여있는 풍경이란)과 소들이 하나둘씩 몸뚱이를 가누지 못하고 병든 눈빛으로 고꾸라지는 장면은 근래 영화 중 가장 뇌리에 꽂히는 도입부임이 틀림없다. 이 분위기가 초반부에 한정된 점과 시각적 긴장이 하 강곡선을 그리는 점, 그리고 일부 반전(주민등록번호, 김제석의 정체 등)이 너무 세속적이거나 어느 정도 예측 가능한 점은 아쉬운 점이다.


 황 반장이 게시판의 잡다한 유인물을 뜯어내며 실종아동들의 공통점을 확인하는 장면. 본작에서 가장 큰 안타까움을 느낄 부분이다. 만약 그들이 이 공통점을 일찍 발견할 수 있었다면, 최소한의 의심을 가졌다면 99년생 영월 출신 소녀들을 한 명이라도 더 구할 수 있지 않았을까. 박 목사처럼 우리 인간은 이러한 패턴을 찾아 의미를 추출한다. 이것이 사바세계에서 절대자의 의중을 파악할 인간에게 주어진 몇 안되는 방법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러한 방법은 단 하나의 반례로도 쉽게 무너져 내린다. 숭고의 경험은 바로 그런 비상식으로 인한 과부하에서 온다. 때로는 그 밀려오는 파도에 고개를 숙이는 방법도 있다. 그저, 뜻대로 하소서. 이는 궁지에 몰린 이들이 할 수 있는 공허하지만 간절한 외침이다. 여기서 더할 생각은 절대자가 바스러질 이들에게 눈시울을 조금이라도 붉히길 바라는 것뿐이다. 



<'그것'을 죽일 뻔한 독극물 든 개밥을 차버린 것은 '그것'이 자신을 지켰을지 모른다는 생각이었을 것이다. 그리고 본작의 정서를 훌륭하게 빚어낸 이재인 배우에게 감사드린다.>









추신 - 오늘날, 한국 장르 영화에 대한 단상.


 누군가는 가능성을 보았을 것이다. <신과 함께>는 두 편을 동시 제작한 제작 방식에서도, 판타지와 SF를 필두로 하는 장르물에서도 기념비적인 사건이었다. 물론 선례가 최후로 남을 수도 있다. 하지만 관객들이 작품을 선택하는 방식에 있어서 장르가 차지하는 허들이 낮아지고 있음은 분명하다. 이는 <부산행>을 필두로 하는 좀비물이 그렇고, 한 예시로 tvN 드라마 <도깨비>도 들 수가 있을 것이다. SF를 제외하곤 장르를 핑계 댈 수 있는 경우가 사실상 사라졌다. 그리고 초연결사회에서 관객들이 무엇보다 중요시하는 건 배우도, 감독도 아닌 입소문이다. '재미'가 가장 중요한 척도가 되었다. 


 그리고 이 재미는 오히려 스트레이트 하게 한 장르의 장점만을 끌어안는 작품에서 나온다. 백화점식 영화의 시대는 지났다. 이제 작품을 마주할 수 있는 통로는 많아졌고, 시간에 구애받지도 않는다. 무엇보다 내 취향에 맞는 작품만 보기에도 인생이 짧을 정도로 콘텐츠가 넘쳐 흐른다. 그렇다면 차라리 자신이 원하는 것만 담은 영화를 선호하게 되는 것이다. 지지부진하지도 않고 말이다. 작년 한국영화의 처참한 성적은 식상함과 더불어 많은 부분 이 지점에서 비롯했다고 생각한다(어쩌면 둘은 일맥상통한다. 많은 것을 담는 공식은 한정되어 있으니.)


 하지만 앞으로 나오게 될 장르 영화들에 대한 변명을 좀 하고자 한다. 의미 혹은 동정을 쥐어짜는 강박에 관해서 말이다. 하지만 나는 이것은 작품의 문제가 아닌, 대한민국 영화판에 장르 영화의 파이가 너무나 작기 때문에 생기는 문제라고 본다. 모든 소수가 겪는 문제로, 이 소수가 다수와 맞붙기 위해서는 일종의 정당성을 획득해야 한다. 자신이 다수와 어깨를 나란히 할 자격이 된다는 정당성. 이것은 장르에 있어선 의미 강박으로 이어지고, 캐릭터에 있어선 감정보다 능력에 있어서 완벽한 캐릭터(메리 수)로 이어진다. 아쉬운 점은 당연히 말해야 한다. 하지만 장르 영화의 파이를 늘리기 위해선 이런 점에 실망해서 평가절하해선 안 된다. 무엇보다 파이가 늘어나야 하고, 그렇기 위해선 흥행에서의 선례가 뒷받침되어야 한다. 억지로 밀어주라는 말이 아니다. 그 영화가 자격이 있다면 앞서 말한 부분은 어느 정도 감안하고 밀어줘야 우리가 원하는 스트레이트한 장르영화가 나오는 배경이 될 수 있다는 뜻이다. <부산행>이후 왜 한국산 좀비가 늘어났는가? 원래 있던 좀비 관련 시나리오들이 컨펌을 받고 투자를 받았기 때문이다. 정말 당신이 의미 강박에서 벗어난 국산 장르 영화가 보고 싶다면, 생각해봐야 할 부분이다. 아마 가장 가까운 시기는 <사냥의 시간>이 아닐까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