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애호가의 흔적/본 것

아쿠아맨 - 왕보다 위대한 존재가 되라면서요

※ 이 리뷰는 스포일러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아서 커리는 아틀란티스의 여왕인 아틀라나와 인간 등대지기인 토마스 커리 사이에서 태어난 혼혈이다. 어느날 이 가족은 아틀란티스 군인의 습격을 받고, 아틀라나는 가족의 안전을 위해 아틀란티스로 돌아간다. 세월이 흘러, 잠수함을 위협하는 해적을 처리하는 등 남들보다 우월한 신체능력을 활용해 자경단 노릇을 하던 아서는 제벨 왕국의 공주인 메라의 요청을 받는다. 인간과의 전쟁을 일으키려는 아틀란티스의 왕이자 아서의 이복동생, 을 막기 위해 아틀란티스로 돌아가자는 것. 아틀란티스로 간 아서는 왕위를 건 싸움에서 평생을 물 속에서 살아온 옴에게 무참히 지고 만다. 결국 아서는 옴이 남은 두 왕국을 규합하기 전에, 메라와 함께 아틀란티스의 초대왕인 아틀란의 삼지창을 찾는 모험을 떠난다. 



  최소한 이 영화는 <저스티스 리그>의 함정에 빠지진 않았다. 플롯의 기초를 다시 세우는 재촬영을 한 탓에 천문학적인 제작비가 들어갔지만 , 이야기는 그냥저냥에 비주얼을 풍비박살 나버린 그 영화 말이다. 심지어 <아쿠아맨>에서 '그 영화'와의 관계조차 분명하게 세우지 않는다. 메라와 아서는 만난 적이 없는 것 처럼 묘사되지만, 아서는 스테판 울프를 상대한 것으로 언급된다. 완전히 연결되지도, 그렇다고 완전히 분리되지도 않는 이상한 관계. 사실 이런 건 별로 중요하지 않다. 단일 영화가 더 중요하지. 볼거리의 측면에서는 충분히 만족스럽다. 히어로 영화들 중에 이정도의 물량 공세를 쏟아부은 영화로 기억되는 건 <어벤져스: 에이지 오브 울트론> 정도 뿐이 없지 싶다(이렇게 말하면 양적인 측면만 대단하다고 말하는 것 같지만, 질적인 측면도 꽤나 괜찮다.). 하지만 영화에게 정면으로 물어보고 싶다. 그래서 아서 커리는 어떤 사람이야?


<아틀란티스인의 초인적인 신체능력을 가장 잘 보여준 격투장 시퀀스. <맨 오브 스틸>의 마지막 장면을 보는 듯 하기도>



 아무리 영화 내용을 복기해봐도 아서 커리는 어떤 사람인지를 표현해주는 부분은 손에 꼽을 정도다. "어려서부터 세게 보이려고, 분노와 주먹으로만 문제를 해결해 왔어." 정도의 대사와 엄마에 대한 그리움, 생각보다 똑똑하다는 점 정도. 영화는 초반의 많은 시간을 할애해 그의 기원엔 상당한 공을 들이지만, 그의 성장기는 매끈한 연출로 벌코와의 관계와 싸움의 기술을 떡밥으로 제공할 뿐이다. 아서 커리의 성격을 규정하자면, 착한데 그렇다고 엄청 착한 것도 아니고 가끔씩 농담도 던지고는 뭐 쿨한 그런 사람, 정도로 어정쩡하게 규정될 뿐이다. 그러니 마무리를 자조적으로 또 다시 엄마를 찾는 가족 상봉이라고 이야기하는 것도 필연적인 결과인 셈이다. 우리가 그에 대해 인간적인 면모를 느끼게 설득한 부분은 어머니에 대한 것 뿐이니까(그리고 이 부분이 애뜻해지는 것은 일편단심인 아버지의 공이 더 크다.).


 하지만 어머니에 대해서 더욱 흥미로운 지점은 옴에게서 온다. 옴이 뭍을 파괴해버리려 하는 이유는 대의적인 면에선 무분별한 환경 파괴일 테지만, 개인적으론 어머니의 죽음이 뭍과의 접촉해서 벌어졌기 때문이다(벌코가 이런 치부를 드러내는 대사를 해줬다면 좀 좋았을까.). 그 결과, 자연스럽게 형인 아서의 존재도 껄끄러워하는 것이고 말이다. 이것도 물론 대의적으론 자신의 왕위를 위협하기 때문이고, 개인적으론 어머니의 죽음을 떠오르게 하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반면, 우리가 응원해야 할 존재들은 지나치게 단순하게 움직인다. 메라는 옴과 대립각을 세우며 '모르는 대상에 편견을 가지는 건 옳지 않다'고 충고하듯 말하고, 벌코가 아서를 어린 시절부터 돌봐온 이유도 분명치 않다. 아서가 이 여정에 동참한 것이 그나마 흥미롭게 표현되었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옴이 일으킨 거대한 해일에 휘말렸을 때, 아서는 아버지를 태운 차를 찾아 한동안 헤매다 찾은 후에는 메라의 도움이 없었다면 그를 잃을 뻔했다. 옴의 위협이 대의적이자 개인적으로 아서에게 다가온 유일한 순간이다. 


<블랙만타는 굉장히 경제적으로 아서와의 악연을 담은 느낌. 그의 비주얼에 개연성을 부여한 건 재미있었다.> 



 그런 점을 보면 이야기의 구조는 부실하고 전형적이지만 제법 재미있게 볼 수 있는 이유를 알 수 있다. 제임스 완은 이야기 진행을 위해 필수불가결한 부분을 시각적으로 구성해 보여줬기 때문이다. 예를 들면, 아서가 메라와 사랑에 빠지는 부분이 있다. 메라가 시칠리아에서 받은 장미를 맛있게 '먹는' 부분은 초반에 아틀라나가 토마스의 집에서 금붕어를 먹는 장면과 대구를 이룬다(하지만 이 장면의 문제는 재미가 없다는 것이다.)그들의 사랑을 일종의 가족력으로 제시하는 셈이다.여기에 아쉬운 점은 메라가 아서를 사랑하게 되는 계기가 절대적으로 부족한 점이다. 또 세세한 설정이 너무 영화 외적인 요소만을 위해 존재한다는 지점도 아쉽다. 귀족들만이 물 밖에서 숨을 쉴 수 있다는 설정은 마지막 대결에 어떻게 밖에 나와 싸우는가 하는 설정 충돌을 모면하기 위한 것으로만 보이고, 삼지창이 있는 곳이 처형할 때 이용하는 트렌치가 서식하는 곳이라는 점은 아틀라나와의 극적 재회를 위한 것으로 보인다. 


 아서가 수중 생명체와 소통할 수 있다는 설정도 별로 흥미롭게 사용되지 않는다. 메라의 물을 다루는 능력이 시칠리아에서 와인을 박살내는 부감숏까지 주어지고, 인간 몸의 액체까지 조종할 수 있음을 내비치지만, 아서의 능력은 카라덴의 넋두리를 들어주는 데 사용될 뿐이다. 삼지창을 찾기 위한 여정 자체가 험난했지만, 그 후에 자신을 증명하는 부분이 너무 긴장감 없이 연출된 것도 아쉬운 부분이다. '아서'라는 이름이 아서왕의 전설을 연상시키는 걸 엑스칼리버로 연결시키는 건 좋았는데, 삼지창을 뽑는 데 어떠한 장애물도 없고 카라덴은 (아마도 아틀란이 소통했다 하니 엄청난 격세 유전으로 얻은) 소통 능력으로 그냥 조용해지니 말이다. 트렌치조차 조종하는 삼지창 자체의 능력(그리고 그걸 만드느라 아예 멸망해버린 지상 시절 아틀란티스)이 아서보다 압도적으로 좋아보이는 건 나뿐인가.


<<블랙팬서>가 전통과 하이테크 사이에서 갈팡질팡했다면, <아쿠아맨>은 매혹적인 하이브리드를 선사한다. 어린 시절 로망도 이뤄주고 말이다.>



 이런 아쉬운 부분들을 뒤로 하고, 작품의 비주얼에 대해 이야기하자면 실로 대단하다. 일단 물속에서 살아가는 아틀란티스 풍경이 압도적인 것은 물론이고, 실제 물속에서 말하고 싸우고 이동하는 부분들을 그럴듯 하게 표현한 점이 가장 큰 성취이다. 특히 물 속에서 머리카락의 움직임은 정말 대단했고, 수중 이동 장면은 DC 특유의 박력을 떠오르게 하는 면이 있다. . 또 각 왕국 간의 개성도 제법 살아있는 편이다(제벨과 아틀란티스는 탈것에서 해마, 상어 정도만 차이나고 똑같은 인간형인 점은 아쉽다.). 물 밖으로 나온 아틀란티스 인들의 갑주는 육지밖은 익숙하지 않아 미숫한 기술이라는 설명도 없이 너무 대놓고 플라스틱 파츠여서 초반부터 제법 위화감을 선사했다(사실 이 위화감은 아틀라나의 옷부터 출몰했다.)


 전체적으로 모든 액션 시퀀스가 조밀하게 계산된 롱테이크로 구성되어 있는데, 마블 유니버스에서 액션의 정수로 평가받는 <캡틴 아메리카: 윈터 솔저>가 촘촘한 편집으로 짜여진 <본 시리즈> 스타일의 액션인 점을 볼 때, 시리즈에 개성을 부여하는 선택이라 생각한다. 좁고(커리가의 집) 넓은(아쿠아리움 검투장) 장소에서의 육탄전은 물론이고, 시칠리아에서의 추격전과 대미를 장식하는 대규모 난전까지 정말 모든 종류의 전투를 집어 넣은 종합 선물세트라 할만 하다. 또 트렌치들이 등장하는 시퀀스는 감독 특유의 면모가 작 들어난 장면이라 반가웠다. 단순한 갑툭튀가 아닌, 천둥을 사용해 우아하게 등장시키는 게 역시 <컨저링>의 감독다웠다.


<네레우스 왕도 아쉬운 부분이 많다. 돌프 룬드그렌의 모습은 좋았지만, 캐릭터가 왕임에도 너무 수동적으로 그려진다.>



 한 세계를 창조한다는 것. <아쿠아맨> 속 아틀란티스는 시각적으로 흥미롭게 그려졌다. 과거의 영광과 미래를 향한 야망이 공존하는 곳. 하지만 정신적인 측면은 애초에 설명이 너무 적을 뿐더러 지나치게 구식이다. 그렇게 아틀란티스는 빛좋은 개살구로 남는다. 뭐 왕도물은 그 자체로 구식이지만, 현재를 비춰볼 구석도 하나 없이 이야기가 만들어졌다는 점은 비판할 만 하다. <아쿠아맨>은 자신의 운명을 거부하지만 기어고 받아들이는 이야기라기엔 내면갈등이 지나치게 적고, 자신의 운명을 개척하는 이야기라기엔 적나라하게 일직선이다. 아틀라나는 아들에게 왕보다 위대한 존재가 되라고 했지만, 그 존재가 되기 위한 방법은 결국 왕이 되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 여정을 통해 아서 커리는 성장했을까? 누구도 자신있게 대답하진 못할 것이다. 우린 그에게 결핍되었거나 트라우마로 자리잡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 모르니까. 결국 이 이야기는 또 한편의 가족 이야기로 퇴화한다. 메인 캐릭터의 캐릭터가 증발한 캐릭터 무비는 이토록 공허하다. 하지만 갑각류처럼 그 겉껍질이 용케 결승선까지는 오게 해준다.


<설마 설마 이 코스튬까지 실사영화에서 나올 줄은 몰랐다. DC의 고집이라면 고집, 뚝심이라면 뚝심이랄까. 개인적으론 좋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