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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호가의 흔적/본 것

살아남은 소녀와 죄 많은 아이

※영화 <살아남은 아이>와 <죄 없는 소녀>에 대한 스포일러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한 아이가 죽었다. 그리고 남겨진 이들의 이야기. <살아남은 아이>와 <죄 많은 소녀>, 이 두 작품은 작품 외적인 부분을 제외하더라도 둘을 동시에 생각할 수밖에 없는 작품이다. 두 작품 모두 죽게 된 한 소년/소녀의 부모와 이의 직/간접적인 주동자를 다루고 있지만, 무게 중심을 서로 다른 지점에 두고 있기 때문이다(남겨진 아이, 기현과 영희가 정반대의 양상으로 주변 인물들에게 인식되는 점도 그렇다.). 하지만 먼저 언급해야 하는 건, 이 두 영화를 단순히 각각 피해자와 가해자를 다룬 두 편의 연작으로 취급해선 안 된다는 것이다. 두 작품 모두 그보다 훨씬 깊고 까다로운 이야기를 하고 있으며, 등장인물 역시 그 두 가지로 명확히 규정할 수 없기 때문이다(이는 <죄 없는 소녀>가 특히 그렇다.).



<그날의 기억은 파편화된다. 처음 화장품가게에서 만남. 그리고 헤어짐. 터널 안을 걸어가는 두 여자아이, 그리고 키스. 그리고 클럽.>



고백의 영화, 의심의 영화


  진실은 쓰다, 무겁다, 그리고 진득하다. <살아남은 아이>에서 중간의 고백을 통해 남겨진 이들의 이야기는 피해자(와 그의 가족)와 가해자의 이야기로 재편된다. 하지만 이 의도치 않았던 진실은 숨겨진 순간보다 드러났을 때 미숙과 성철에게 더욱 큰 고통을 안긴다. 이는 아들인 은찬이 영웅으로 남는지와는 별개의 문제다. 어쩌면 여전히 은찬은 준영을 지키기 위해 그 위험한 초대에 응한 것임으로 영웅으로 남을 수 있다. 하지만 정작 중요한 것은 아들의 죽음이 자연에 의한 불가피한 희생이었던 것이 아닌, 살인할 의도까지는 없었던, 그러나 살인이 된 사건 때문이었다는 것이다. 이제 연민과 정으로 이어졌던 은찬 부모와 기현 간의 관계는 완전히 뒤틀려버릴 것이다.

 

 하지만 우리는 다른 양상을 마주한다. 그들의 관계는 새로운 국면을 마주하지만, 새로운 적대적 관계가 등장하기 때문이다. 침묵하는 이들. 어쩌면 단순히 성철이 은찬을 인지하는 장면으로만 기억될 오프닝은 여기에서 새로운 단서를 제시한다. 무엇 때문에 소리를 지르며 달린 은기현, 그리고 뒤이어 뒤따라오는 소년들. 소년들은 입을 맞춰 진실을 외면한다. 특히 안타까운 지점은 준영이라는 아이. 가방을 모조리 드는 모습으로 집단 괴롭힘을 당하는 게 명확해 보이는, 그리고 은찬의 죽음에 간접적인 원인을 제공한 준영은 진실의 무게에서 도피한다. 이때부터 이 영화는 본색을 드러낸다. 의도를 넘어서 벌어진 살인이란 사건에서 가해자를 구원할 수 있는 건 오로지 죽음을 불사하는 죄책감뿐이다. 기현은 증언 속에서만 살아남았다가, 그 죄를 고백하고 또 이를 스스로 감당하려는 순간 진정으로 살아난다. 


<고백하는 주도자와 침묵하는 방관자, 관객은 결국 누구의 손을 들 것인가.>


<명예는 허울 뿐인가? 그렇다면 진실은 어떠한가?>


  <죄 없는 소녀>는 관객과의 게임을 시도한다. 작품을 보자마자 마주하는 이미지. 대부분의 아이들이 하교를 하는 듯 하지만 몇몇 아이가 대걸레로 바닥을 닦는다. 그리고 화장품 가게에서 벌어지는 일련의 사건. 영희와 한솔은 화장품을 훔치고, 경민이 되려 의심을 받는다. 그리고 이 장면은 영화가 끝날 때까지 언급되지 않는다. 관객은 영희에 대해 불신을 먼저 갖게 된다. 그리고 자연스럽게 이 사건이 진실에 어떤 모습으로 드러날지 끊임없이 기대한다. 하지만 그런 일은 없다. 관객은 주인공이 얼마나 나쁘던 간에 주인공이 위기에 처하면 그를 연민하고 강렬한 공감에 빠진다. 일종의 블러핑으로써 작용하는 이 장면은 관객도 서로 할퀴고 할퀴는 죄와 의심의 먹이사슬에 참여시킴으로써 의심의 메커니즘을 강화한다.


 <죄 많은 소녀>가 오히려 훌륭해지는 부분은 모두를 당황하게 할 (심지어 감독도 이를 감당하지 못하는 듯한) 후반부에서 나온다. 우리가 알아들을 수 없었던 오프닝의 수화는 결국 일종의 선언이었다. 너희가 나를 할퀸 만큼 나도 너희들을 할퀴주겠다고. 이는 논리적이지도 않고(자신의 폭행을 사주한 유리를 때리지 않고, 그녀가 데려온 소문 주동자를 공격한다. 그리고 껴안는다) 상식적이지도 않다(다솜을 사주해 담임을 성추행으로 신고한다.). 그리고 그녀는 살아감으로써 그 죽음을 완성한다. 그림자 하나에 경민의 자리를 놓아주면서.


<이는 단순한 죄'의 재생산(혹은 자가복제)인가. 어쩌면 영희의 철저히 계산된 행동은 아닐까.

아, 그리고 중간에 영희 집에서 벌어지는 집단 린치 장면은 단연 충격적이지만 온전히 픽션은 아닐 것이다.>




부모, 그 부채감과 책임감


 남겨진 부모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이 문장 자체가 참으로 애처롭게 느껴진다. 애도로도 벅찬 이들에게 행동지침이라. 우리는 이미 국가라는 힘 앞에 몇 년의 세월을 고통 속에 보낸 남겨진 부모들을 알고 있지 않는가?(<살아남은 아이>의 후반은 명백히 이에 영향을 받았을 것이다. - 각자의 이해관계에 따라 진실을 묻으려는 부모와 학교 측.) 우리는 이 두 작품에서 이와 같은 위치에 놓인 두 부모를 마주한다. 죽은 아이가 이어준 인연은<살아남은 아이>에선 속죄와 삶의 발판을 마련하지만, <죄 많은 소녀>에선 강력한 안타고니스트로 변모한다. 물론 이는 결국 영화가 누구를 중심으로 전개되느냐에 관련이 있지만, 기본적으로 영화가 그리는 죽음 이후의 잔향이 다르다. 


 <살아남은 아이>가 감정적이지만 논리적인 밑받침을 가지고 간다면, <죄 많은 소녀>는 광기에 가까운 순간적인 감정에 기초한다. 또 죄 많은 소녀에서 경민이의 아버지가 초반에 보험금에 관련해서만 그 존재감을 드러낼 뿐, 대부분 경민이의 어머니가 영희와 부딪힌다는 점도 눈여겨볼 부분이다. <살아남은 아이>에서 시험관으로 얻으려던 아이를 낙태하고 마는 사건은 미숙이 기현을 제대로 대면하게 되는 기회를 제공하고, '어쩌면'하는 생각하게 만드는 계기를 제공한다. 그리고 초반에 성철과 언쟁을 벌였던 은찬의 유품을 기현에게 전해주려는, 즉 후원자가 되고자 하는 모습을 보인다. 


 그리고 이는 <죄 많은 소녀>에서 가장 소름 끼치는 장면과도 맥을 같이 한다. 자신이 경민의 보험금으로 영희의 수술비를 댔다며 '어느 정도는 권리를 가지고 있는 것 아닌가요?'라 묻는 경민 어머니의 모습은 그야말로 지긋지긋하다. 이는 사실상 자진한 거래와 다름없기 때문이다. 그녀는 자신의 딸을 위한 추모를 연관된 아이를 향한 저주로 바꿔놓았다. 그녀의 명백한 목적(끊임없이 딸을 잊지 말라는, 그게 죄책감은 아닐지라도)은 그야말로 온갖 미친 짓들이 난무하는 이 영화에서도 가장 무시무시한 모습이다. 어쩌면 이런 부모와 남겨진 아이의 관계를 설정하기 위해 학교와 경찰을 무능하게 설정했는지도 모르겠다. 특히 철저히 이익집단처럼 행동하는 교사들을 보는 건 그 무엇보다 가슴 아픈 일이다. 


<도배는 덮기만 하는 과정이 아니다. 먼저 벗겨내야 하는 것이 있다.>


<수색 과정에서 흥미로운 지점은 철조망을 두른 대로 강을 훑으면 시체가 훼손될 수 있는데 부모 중에 누구도 거기에 감정적으로 반응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결국 그들에게 중요한 건 죽음이라는 확정된 사실 뿐이다(이는 경민 할머니의 무속의식과 대조적이다.).>




죄, 속죄, 죄책감


 다시 써보는 이야기. <죄 없는 소녀>가 한솜의 이야기라면, 이것이야말로 <살아있는 아이>의 이야기와 같은 맥을 가지고 뛰는 이야기이다. 숨긴 죄와 고백에 관한 이야기니까. 하지만 이조차 경민의 유서가 발견되며 물거품이 된다. 경민이 왜 자살했는지는 명시적으로는 드러나지 않지만, 지목된 영희의 혐의는 죽은 이의 혓바닥에 눈녹듯이 사라진다. 하지만 경민의 죽음의 죄책감을 느꼈다면 그것이 곧 죄다. 그렇지만 그 죄는 씻을 수 있다. 하지만 장례식장에서 영희의 행동은 과연 어떤 의도였을까? 난 결백해? 혹은 다 좆돼봐라? <죄 많은 소녀>는 어느 방향이든 풀어헤칠 거리가 많다.


 내가 주목하고자 하는 부분은 영희가 경민에게 동질감을 느끼고 있었다는 사실이다. 이는 경민의 자살에 대해 시기심(자신이 자살하려는 방식으로 자살했다는 것)과 애정(클럽과 터널에서의 행동)으로 나타난다. 어쩌면 둘의 키스 장면은 거울에 대고 입을 맞추는 것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닐지 모른다. 하지만 경민도 영희에게 같은 감정을 느끼고 있었는가. 하지만 그녀의 이름은 유서에 다른 아이들과 다를 바 없이 적혀있을 뿐이었다. 그녀가 학교에 돌아온 건 바로 그 때문일지 모른다. 죽어버린 건 그저 거울의 상 像이었음을. 그리고 그녀는 다시금 그녀의 이야기를 꿰찬다. 죄책감을 느끼지 못하는 위선자(다솜, 유리, 담임)들을 교묘하게 이용하면서.


<참고자료일 뿐이라며, 증거로 사용되지 않는다는 그의 말은 그 의심이 불러온 영희의 운명으로 비추어볼때 얼마나 허망한가.>




글의 끝, 영화의 크레딧, 다시 불은 켜지고, 사유의 시작


 죽음으로 시작한 그들의 이야기가 어디로 나아갈 수 있을까. 걸출한 데뷔작에 소포모어 징크스에 걸려버리는 게 아닐까?(논리적으로 보자면, 이는 첫 데뷔작 때 태어나서 지금까지의 모든 경험을 쏟아부은 후 두번째 작품에서 그 (소재나 사유의) 양이 빈약해지기 때문이다.) 누군가는 우려할 것이다. 데뷔부터 죽음을 다뤘는데, 앞으로 더 나올 것이 있을까. 정정해주고 싶은 게 있다. 결국 이 두 작품은 죽음 이후의 파동을 다루고 있고, 설령 죽음을 다뤘다 해도 문제 될 것은 없다고. 그대가 진심으로 덤빈다면, 죽음 이후에 진정으로 살아날 수 있음을 기현과 영희가 증명하고 있지 않은가. 비록 그 세상이 죽어있다 해도 말이다.